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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ESSAY ‘만들이’란 소와 함께한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 중 하나입니다.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던 풍속이지요. 국민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한우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만들이! <만들이>는 우리 땅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우리 한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국내 유일의 한우문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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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가을 한우고기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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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선태 경상대학교 교수

 

사람들은 이중섭을 비운의 천재 화가라고 부른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부대끼다 불과 41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지독한 가난과 신병, 고독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은박지 그림이나 엽서 그림을 그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 화가가 되었다.

 

민족 화가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주제는 자신의 인생을 닮은 소였다. 소 그림은 이중섭에게 있어 생존이자 생활이었고, 생애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귀포의 한 평 남짓한 골방에서 눈물범벅으로 그려낸 그의 소 그림들을 보면 그의 삶이 보이고, 방벽에 덕지덕지 써 붙여놓았다는 그의 유일한 시인 ‘소의 말’을 읽으면 그의 삶이 읽혀진다.

 

이중섭은 조카 이영진이 방벽에 붙여 놓은 시 ‘소의 말’을 보고 시도 쓰냐고 묻자 “아니, 소가 말을 하길래 받아 적었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조카가 “소가 조선말을 잘하네.”라고 하니 이중섭은 “조선의 소니까.”라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시의 구절구절마다 조선 소, 한우의 심성과 품성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하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중섭의 소 그림을 보면 그의 삶을 금세 느낄 수 있다. 눈물로 그렸을 그의 그림에서 소는 자신의 얄궂은 처지를 묵묵히 감당하는 그 자신이었으며, 함께 하고픈 가족에 대한 그의 우직하고도 슬픈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소의 말은 자신의 말이었고, 어려운 처지의 삶과 담대히 맞서는 소의 자존심은 자신의 자존심이었다. 소의 정서가 자신의 정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서를 가진 이가 비단 화가 이중섭 뿐이겠는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중섭과 같은 정서 한 자락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의 소, 한우에 대한 감성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한우의 맑고 큰 눈을 보면 다른 가축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깊은 슬픔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끈끈한 정과 함께 무상의 헌신이 느껴진다. 그래서 한우를 보면 누구나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나의 경우, 한우를 보면 엄마가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 ‘한우’하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엄마라고 답한다. 아릿하게 아프지만 또 한편으로 뜨겁게 고마운 슬픈 감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영양과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그 사랑은 한우를 닮아도 너무나 닮아 더욱 가슴이 아린다.

 

내가 한참 성장기였던 10대 시절에 우리집은 가난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았던 학창시절 내 도시락은 항상 밥과 김치, 콩자반, 깍두기였다. 소고기는커녕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연중행사로 먹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엄마는 동네 할머니를 대상으로 야매파마를 하셨는데, 독한 파마약 때문에 손톱이 뒤로 말려가는 고통을 참아내는 힘든 노동의 댓가로 매일 자식들의 먹거리를 근근이 마련하였다. 집안 형편이 이러니 나에게 양질의 단백질이 풍부한 한우고기 같은 고급 식재료는 언감생심이었다.

 

사실 나는 키가 이렇게 작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175cm의 아버지를 둔 내 키가 165cm밖에 되지 않은 이유는 한참 성장기에 양질의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우 같은 양질의 단백질 식품의 섭취가 극도로 부족했기에 아버지의 키 유전자가 100% 표현형으로 발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내가 부자집 아이들처럼 한우불고기만 주기적으로 먹었어도 나는 175cm 키를 가진 멋진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아직 어렸던 나는 부잣집 아이들이 엄마아빠와 함께 큰길가에 있던 고깃집에서 한우불고기를 맛있게 먹던 모습을 종종 부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것은 어린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고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도 한우는 비싸서 먹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당시와 비교할 수는 없다. 고깃소로 사육되는 한우의 생산량이 많지 않아 식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이 한우였고, 당시 최고급 추석 선물도 한우갈비 선물세트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요즘처럼 한우불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마블링이 환상적인 최고급 한우 등심은 요즘도 쉽게 먹기 힘들 정도로 비싸지만, 그래도 불고기감 부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우불고기도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없었고, 어린 나는 정말 큰길가 고깃집에서 한우불고기를 먹던 부잣집 아이들이 부럽고 또 부러웠었다.

 

기억을 되돌려 보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당시 모습 한 컷이 있다. 엄마와 함께 큰길가 고깃집 앞을 지나칠 때였는데, 엄마는 내가 고깃집 안을 볼까봐 애써 얼굴을 돌려 외면하시며 내 손을 잡은 발걸음을 빨리하셨다. 그때 나는 엄마의 눈가에 기미보다 짙게 퍼져있는 삶의 외로움과 서글픔을 얼핏 보았다. 그렇게 큰길가 고깃집 앞에만 가면 걸음이 빨라지는 엄마는 고깃집은커녕 집에서조차 단 한 번도 한우로 불고기를 해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나를 데리고 한우불고기집을 찾았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뒤로하고 미국 유학길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늙고 가난한 엄마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듯 제 살길 찾아 미국으로 떠나는 아들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아들 입에 상추에 싼 한우불고기를 넣어주시기 바쁘셨다. 엄마는 소고기 먹으면 체한다고 하시면서 내 입에만 계속 넣어주시던 한우불고기, 그해 가을 난생처음 엄마와 단둘이 큰길가 고깃집에서 먹었던 한우불고기 맛은 지독하게 서글펐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가을에 먹는 한우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다. 엄마와 단둘이 먹었던 한우불고기의 서글펐던 맛까지도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그 한우불고기의 그리운 맛을 찾아 나는 가을이 되면 아들딸과 함께 한우를 먹는다. 아빠는 축산학과 교수라 학교에서 많이 먹는다고 하면서 아이들 입에만 상추에 싼 불고기를 넣어주는 내 모습은 엄마에 대한 나의 지독한 그리움이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는 소의 말처럼.

 

주선태 교수는

고려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과 코네티컷 주립대학 연구원 생활 이후, 1998년부터 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축산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식육의 기초지식〉, 〈식육의 처리〉, 〈식육과학〉, 〈식육유통품질관리학〉 등 다수의 학술도서 외에 교양도서 〈고기예찬〉, 〈대한민국 돼지고기가 좋다〉, 〈고기수첩〉, 〈한우고기예찬〉, 〈인간과 고기문화〉 등이 있다.

인터넷에서 필로(Philo, 筆路)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주선태 교수는 국내 축산과 육식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방송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필명 필로(Philo)는 ‘사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최근 필로 사르크스(Philosarx, 고기예찬)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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